나에게 일어난 일:
1. 6월 초: 회사 짤림
2. 6월 중순: 현타와서 제주 여행 열흘 옴
3. 6월 말: 여행 마지막날에 한달살이집 구함
4. 7월 초: 한달살이 살면서 일년살이집 구하는 중
5. 일년살이집 살면서 알아보고 집 사서 고치겠다는 생각중
6. 인생 뭔지 모름
와이프랑 만나고 며칠 안된 극초기에, 나는 너무 고민돼서 심지어 회사가서 동료에게 고민상담을 함. “사실 제가 썸타기 시작한 분이 있는데, 매일 아침 딱 8시 34분에 카톡이 와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동료가 듣더니, “그 분 출근하시면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오리 님 생각하나봐요!”
함께주택 5호 구산동 공고 뜸. 3호 살아본 사람으로서 장단점:
1. 집주인이 없고 내가 집주인(?)
2. 전반적으로 다양성에 열린 분위기
3. 집세도 안 오르고 10년간 살 수 있었음
4. 매달 거주자 회의 있음
5. 살다보면 조합 이사회 활동을 해야 할 수도 있음
6. 위치 대비 시세 대비 집 상태가 괜찮음
6천원 백반집 사장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다. 선결제를 해뒀었는데, 얼마 남았냐고 여쭤봤더니 7만원이나 남았단다. 돈으로 돌려 주신다는 걸 그러지 마시라고 했다. 메뉴판을 보니 그 집에서 제일 비싼 메뉴가 닭볶음탕(대) 35,000원. 두 개 해달라고 했다. 특대 닭볶음탕 두 개를 양손에 들었다.
어릴 때 경상도 살다가 서울로 전학왔는데, 우리반에 (이름도 기억난다 ㅎㅁ이) 나름 노는 애인 남자애가 내 짝이 됐다. ㅎㅁ이가 기선을 제압하려 했는지 사소한 걸로 트집잡고 한국남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욕 SBN아 그걸 했는데, 억양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웃어버렸다. “니 진짜 귀엽네?” 해버림.
엄마가 장마철에 아플 땐 뜨끈하게 보일러 틀어놓고 에어컨도 살짝 켜둔 후 바닥에 등을 지지면 컨디션이 좋아진다고 했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에너지 낭비인가 싶어서 안했었다. 근데 오늘 해보니까 습도도 잡히고 실내 온도도 적절해지고, 그래서 몸에 면역력도 올라가서 기분이 훨씬 나아짐.
최근 오랜만에 재회한 대학 선배가 나더러 “오리는 말을 참 예쁘게 해.”라고 했다. 그 선배가 다음 번엔 다른 선배를 데려왔는데, “네가 왜 오리랑 있으면 좋다고 하는지 알겠다. 말을 예쁘게 하네.” 라고 했다. 나는 선배들이 말한 ‘말을 예쁘게 한다’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다.
몇 년 전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홍해바다 처럼 갈라졌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가난한 그들’을 다룬 영화로 본 사람들과 ‘가난한 우리’를 다룬 영화로 본 사람들의 시각 차이였으며,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강한 충격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불쾌한 경험이었다.
엄마 친구분이 이렇게 살고 계심. 아버님이 서울에서 농사 크게 짓던 분인데, 그 땅이 올라서 엄청난 부자가 됐고, 사업에는 뜻이 없으셔서 부부가 평생 직장을 가져본 적 없는 채로 여행하고 운동하고 봉사활동하고 기부하고 남들에게 줄 선물 만들면서 산다고. 그 집 아이들도 비슷한 삶.
독일에서 영주권 받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체류허가 연장할 때 일이었다. 외국인청 담당자가 2002년 부터 내가 연장할 때 마다 제출한 증명사진들을 보여주며 이런 말을 했다. “얼굴 좋아진 거 보세요. 저는 외국인청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아시아인들이 독일와서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게 뿌듯해요.”
독일에서 학교 다닐 때 돈이 되게 없던 시기가 있었다. 월세와 공과금 등 꼭 내야하는 비용을 제하면 매달 50유로를 쓸 수 있었다. 오리부인이 그 때 어떻게 먹었냐고 해서 줄줄줄 설명했다. "일단 감자랑 양파가 되게 싸." 나는 요리를 잘해서 그 시기를 잘 넘겼는데, 하루는 버거킹이 먹고 싶었다.
독일의 한 영화 현장에서 일할 때였다. 그때는 전화를 안 받으면 ‘음성사서함’에 삐 소리 후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제작사에서 유선전화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가, 수화기를 제대로 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시아 여성인 나에 대한 성적 농담과 욕설이 녹음되어 있었다. 내 파트의 감독에게 알렸다.
오늘 오랜만에 주유소 갔었다. “채워주세요~” 했더니 젊은 분이 명랑한 목소리로 “가득이요오~” 하시고, 세차 하고 싶다고 했더니 연세 든 분이 세차장 입구를 안내해주셨다. 세차 끝나고 나오는데, 사이드미러에 그 두 분이 서로 걸레 던지면서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보고만 갈 수는 없지.
정서적 독립은 부모에게 친밀감을 덜 느끼거나 의지하지 않게 된다거나 관계가 소원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인정이 내 감정과 결정을 좌지우지 하지 않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아요. 매사에 부모님이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혹은 칭찬하는지가 중요한 시기가 바로 어린 시절이니까요.
제주도 올 때 고양이 짐 다 싸들고 오느라 우리 짐은 무슨 유학가는 사람들 짐이고 고양이 이동장까지 있어서 이미 흠뻑 땀에 젖었었다. 택시기사님이 공항에서 차 세우고 후다닥 우리 짐 내리는 걸 도와주시길래 3천원 드렸는데, 순간 눈빛이 그렁그렁 하시더니 아니라고 택시비만 받겠다 하시는 거.
나에게도 비슷한 말을 한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순간 어디서 배운 것 처럼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선생님의 업소 경험에 대해 저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은 선생님께 부끄러운 일인 것 같아 저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좀 슬퍼졌었다. 존경이 거기서 끝나서.
A friend in Spain was feeling unwell and took a covid test. The good news is it’s not covid. The bad news it is the flu.
The astonishing news is Spanish covid tests are dual-Covid/flu tests and why in the hell are these not available everywhere?!
신도시에 들어와서 살아보니, 아파트를 짓고, 신혼부부들이 분양받기 쉽게 하고, 직장이 들어올 수도 있는 지식산업센터도 짓고, 아이들 다닐 학교도 짓고, 그러면 아이들이 많이 태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만은, 낮은 출생률이 마치 먼나라 이야기 같다.
헉 이거 제가 쓰는 제품!
브라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고 갑갑하지도 않은 티셔츠예요. 처음 펀딩할 때 부터 사입었는데, 요즘은 디자인이랑 재질이 더 발전해서 핏도 예쁨. 사장님이 어떻게건 미세플라스틱 안 나오는 재료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분인 걸로 알고 있어요. 또 좋은 일 하셨길래 공유해요.
주말동안 150벌의 일상기술연구소 노브라티가 튀르키예 기증 목적에 맞추어 다시 포장되었습니다. 저희 제품은 국내 고객들이 인터넷으로 정보를 확인하고 구입하신다는 가정 하에 포장되기 때문에, 튀르키예의 이재민들은 무슨 옷인지 모르고 받으실 확률이 99%쯤 되리라고 판단했거든요.
진짜 고전 개그인데 실화.
그러니까 라떼, ‘했읍니다’가 ‘했습니다’로 바뀐 국어 문법의 대사건이 있었다. 나는 그 때 읍 단위가 있는 시골에 살았는데, 사촌언니가 ‘읍사무소’ 다녀온다고 한 모양이다. 그 말을 들은 언니 친구 왈,
“야, 그거 습사무소로 바뀐 거 모르냐?”
독일에서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한 친구는 일본에서 저널리스트였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독일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내가 왜 가냐고 물었더니, “일본은 사회 문제가 심각해. 심각하게 우경화되고 있어. 나는 거기 가서 기여하고 싶어.”라고 했다.
중학교 때 펜팔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랑 다른 도시 살던 여자아이였는데, 펜팔하면서 우정을 쌓아서 실제로 만나기까지 했다.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친구라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용기내서 편지에 구구절절 썼다. “나 레즈비언이야.” 그런데 한참 있다 답장이 왔다.
나는 기계공학과였고, 구조역학 팀플의 조장이었다. 하중을 자중으로 나눠서 높은 숫자가 나오는 순서대로 점수를 주는 강의였고, 매주 100개의 퀴즈를 풀어가야 했다. 근데, 우리팀 애들이 자꾸 문제를 안 풀어왔다. 하루는, “너네 나 없으면 학점 어쩌려고?” 했더니, “너가 있잖아~” 하는거다.
친한 친구와 쾰른 거리를 걸었던 날이었다. 내 친구는 ‘백인 독일인’이다. 친구가 잠시 어머님과 통화하느라 내 뒤에서 따라 걸었던 잠깐의 순간, 나는 길에서 플러팅과 동시에 아시아인에 대한 조롱을 당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친구는 너무 놀라서 눈물마저 글썽였다. 나더러 괜찮냐고 물었다.
이웃들이 뭘 자꾸 주시는데, 멘트들이 비슷하다.
“키웠는데 많이 열려서”
“요즘 호박이 싸서”
“마트 갔더니 생선이 너무 싸서”
“선물이 많이 들어와서”
“우리애들은 갖다줘도 안 해먹어서”
“아가씨들 둘이 집에서 해먹고 사는 게 보기 좋아서”
“우리 먹으려고 했는데 많아서”
노동절이냐 근로자의 날이냐, 뭐라고 부르느냐도 상당히 중요한 이슈지만, 그럼 왜 ‘근로자의 날’이라고 부르는가가 더 중요하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는 사람만 ‘근로자’라고 부르기 때문. 공무원도, 특수고용직도, ‘원천세 3.3퍼 떼고’ 고용된 직원도 모두 근로자가 아니다.
베를린에서 직장 다닐 땐 내가 외국인임을 자각하게 되는 일들이 일상이었다. 나는 웃으며 버텼다. 결국에는 독일사회에 잘 진입한 케이스가 됐지만, 어떤 ‘유리천장’을 느끼고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내가 여성임을 자각하게 되는 일들이 일상이 되었다. 더는 웃지 않게 되더라.
음식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내 본명이 Nari Kim 인데 ‘으아으아 역시 아시아 이름이라서 받아적기 너무 어렵다’는 경우가 꽤 있었다. 처음엔 내 발음이나 억양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오래 살고 모국어 다음의 제2언어가 되고 난 후에도 그러더라. 낯선 것에 대한 불안, 공포, 혐오까지.
나는 종종 기절하곤 했는데, 독일에서 병원에 갔더니 미주신경성 실신이라고 했다. 잘 쉬면 좋아진다길래 그러려니 하고 계속 기절하면서 살았다. 그러다 어느날 한국왔다가,어릴 때 부터 친했고 어른돼서 의사가 된 친구 병원에 갔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 “너 공황장애잖아. 병원에서 말 안해줬어?”
우리 회사는 전장연 지하철 시위에 연대했었다. 별 건 없고 전장연 시위 여파로 지각을 하는 건 업무시간으로 인정해주는 거였고, 다른 회사들도 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같이 하자는 글도 올렸다. 별 건 없고 그러면 직원들도 좋고 나도 좋고,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 ‘지각으로 연대’라고 불렀다.
내가 아는 유럽인들 다수는 한국이 불교국가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내게 합장해서 인사하는 게 예의라고 까지 여겼다. (차별적으로 놀리려 한 경우는 제외) 내가 실제 한국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종교는 그리스도교이며 2위가 불교, 그리고 인구의 절반은 종교가 없다고 말했더니 다들 놀랐다.
30평 이상의 아파트, 2000cc 이상의 차, 월 500 이상의 수입. 정량화된 (수도권) 중산층의 삶의 지표. 나는 이 숫자에 도달했을 때 얻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인간으로 존중받고 살 수 있는 상태’ 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저 숫자로 들어가면 분노할 일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없다고 안했다.)
서울에 성소수자 공동주택이 있다는 거,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다. 망원동에 ‘무지개집’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면 한국에도 그런 게 있었냐는 말을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도 많이 들었다. 무튼 나도 들어갈까 고민했는데, 뭔가 거긴 싱글들이 모여 사는 느낌이라 나는 다른 조합의 주택으로 감.
우리 할머니는 평생 저속노화 식단을 유지하셨다. 마지막 몇 년은 치매에 걸려 끝에는 나도 알아보지 못하시다가, 돌아가시던 날 온전한 정신이 되어 깨끗하게 씻으시고 자식들을 불러 모아 덕담을 하시고 졸리다며 누우신 후 돌아가셨다. 급속사망이라는 말이 유행인 것을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