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개업하고 며칠 지나지않았을 때. 어느 할머니가 oo방앗간 가는 길을 묻길래 들어오시라하고 검색을 시작했어. 그런 방앗간은 없더라고. 근데 할머니는 방앗간 주변과 그 옆 극장까지 또렷하게 말씀하시는거야. 이모의 방앗간이라 자주 왔다고. 나는 그 극장을 검색했지. 그랬더니
초5방학식날, 선생님이 우리반에서 제일 산만하던 남자애랑 나랑 둘이 남으라함. 다 가고 난 뒤 책상에서 필통을 두개 꺼내 하나씩 주셨어. 방긋 웃으시며 너희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어 하심. 아무 잘한게 없는데 선물을 받으니 가슴이 너무 두근거리는거야. 아직도 기억나네 바른손 소그림 필통.
20살에 장학생 특혜로 한달간 외국에서 지냈어. 내 지갑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었지. 혼자사는 할머니집에는 커다란 욕조가 있었어. 영화에서나 보던 거품목욕을 그때 처음 해봄 얼마나 황홀했던지 학교가서 한국인 친구에게 자랑을 함. 친구가 자기도 해보고 싶다길래 우리는 일주일쯤 고심하다가
갑자기 생각하게 되었는데 나 22살때 캐나다로 어학연수갔을 때 홈스테이 했던 집 할머니 보고싶네. 돌아가셨으려나..
다른 홈스테이집 대비 집도 너무 좋고 내 방도 너무 예뻤다. 취미이자 특기가 요리셔서 매일 맛있는 걸 잔뜩해주고 밤마다 쿠키나 브라우니를 구워서 먹어보라고 주셨지.
할머니 90살 무렵에, 남편형제자매친구 다 잃은지 오래고 조카들마저 세상을 다 떠날 무렵에. 사는거 너무 외롭고 지겹지 않아 할머니, 했더니
얼음 안깨도 물이 나오고 가스렌지 켜면 불이 나오고 세탁기 누르면 빨래가 되서 나오는데 이 신기하고 편한 세상이 왜 지겹냐는거야.
며칠전에 주말인줄 알고 자다가 한시간 지각했거든. 약국 앞에 한시간쯤 기다린 분이 서계셨너. 많이 늦었죠 죄송해요,가 그날 내 첫 목소리였고 당연히 “이렇게 늦게 여시면 어떻해요”가 나왔는데. 그다음 말이 “걱정했잖아요”라서 나 순간 고장났어…너무 먹먹해서 피로회복제 15000원짜리 안겨드림
할머니를 보내고 하루내내 멍했어. 우리도 언젠가 나이가 들면 아름다운 과거와 아픈 현실이 사이를 오가며 살겠지 싶어서.
그때 약국이 안바빠서 다행이었다 생각해. 그오지랖은 너무 한가해서 발동된 것이었을 뿐, 혼빠지게 바쁜 날엔 사람을 2초 쳐다본 적도 없어. 친절은 선의보다 여유더라.
호주 현지인 할머니댁에 잠시 살았을때 아침의 오트밀죽이 너무 고역이었어. 잘 못먹는 내가 향수병이라 생각하신 할머니가 어느날 서프라이즈,하며 나를 불러 나가보니 식탁 위에 라면이 차려놓으셨어. 하얀 면발 위에 솔솔 뿌려진 스프. 할머니는 기대에 가득차 볼이 빨개진채 나를 보고 계셨다.
스무살 봄,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취해 막차를 거꾸로 타 종점까지 갔다. 돈은 없고 버스는 끊겼고 집에 가서 저금통 털어드릴 생각으로 택시를 탔다. 사정을 설명하자 아빠뻘의 기사님이 웃으시며 “감향기가 나네요” 하시는거야. 네?하니 ”청춘이 술을 마시면 단감향이 나요. 좋은 시절이네요“하시고는
유투브 방송에 출연해서 섭외 전화를 개인 전화로 하는 바람에 거절할 수가 없어서 불쾌했다는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걸 보면서, 아빠가 나에게 늘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이효리씨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해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이전시를 통해 섭외를 했다면 거절하는데에
약국 환자 중에, 가지치기하다 사다리가 넘어가 무릎을 크게 다친 과수원 할아버지가 있었어. 일해야할 때 다쳐 속상하다고 우시길래 내가 가지치기하러 감(어릴 때 해봄). 봄에 꽃 솎아야하는데 할아버지 아직 안나음. 그래서 또 가서 꽃 솎고 얼마뒤 열매솎고..얼마뒤 농약치고…그러다
약국 단골 할아버지중에 손이 거칠고 몸이 마른 분이 있어. 제대로 못 챙겨드시는거 같아 오실 때마다 나 먹을라고 산 사과나 파운드케익 같은 걸 나눠드렸어. 근데 오늘 자연산송이 한박스를 탁 놓으시며 익히지말고 소금장에 찍어먹으라 손흔들며 가심 아니 저 이런거 첨보는데 아니 어르신 아니
22살 가을, 누군가의 생일파티에서 거하게 취한 나는 손바닥만한 하숙방에 돌아왔다. 트렌치코트를 겨우 벽에 걸고 겉옷을 훌훌 벗고 쓰러져 잠들었다. 몇시간 후 목이 말라 깼을 때, 이 손바닥만한 방에 나만 있는게 아닌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낮게 중얼거리면서 내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친구가 아기낳은지 백일쯤에 놀러갔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못 본 사이 머리가 산발인거야. 아기 봐줄테니 미용실 다녀오라하니 눈물이 그렁그렁한채 지갑을 챙겨나갔어. 혼자 아기를 안고 거실에 서있으니 이 작은 공간에 백일동안 갇혀지냈던 그녀의 일상이 보이는듯해 너무 맘이 아팠어.
나도 밥먹다 간장쏟으면 늘 0.1초만에 눈치를 봤거든. 그러다 생선구이집에서 반찬그릇 조금 밀었는데 맞은편 간장종지가 넘어가서 애인의 흰 니트에 쏟아짐. 나는 얼어붙었는데 그가 옷을 대충 닦으며 “반찬이 내 앞에 다 놓여있었나봐”라고 웃음. 그게 2n년 지난 지금까지 기억날만큼 문화충격이었다
"할머니한테 상처받은 기억이 있는가?"
> 성별에 따라 대답이 아주 극명하게 나뉠 것이라 확신한다
나 또한 이 차이를 제대로 느낀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면허 따고 맞은 첫 명절에 할머니/아버지/누나를 태우고 운전했을 때였다
(내가 면허 따기 전에는 항상 아버지와 누나가 교대로 운전함)
여자아이들은 부모조차 편들어주기는 커녕 무장해제시키는 짓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엄마 애들이 나 뚱뚱하다고 놀려"하고 애가 속상해하는데 "그치 우리 ㅇㅇ이 살을 좀 빼긴 빼야되겠지?" "살쪘으니 그런 소리 듣고 다니지"이러는 부모들이 있다. 그딴 공격을 하는 상대는 바로 한대 때려도
알바비 처음 받아 버스타고 집에 가던 날, 내 가방에 50만원이나 들어있단게 믿기지 않는거야. 버스안 사람들이 다 내 가방만 보는거 같아 앞으로 메고 꼭 껴안고 서있었어. 야심차게 산 2000원짜리 하이테크펜 볼만 빠져도 속상하던 시절, 늘 돈에 짜쳤던 기억에 청춘이 그립지가 않어.
함께하는 식사라는 것에 대해 설명했어. 알아들은 표정을 짓다가 접시의 시금치 나물을 세더니 아 이건 다섯갠데 내가 세개 먹으면 또 화내겠네? 하며 웃는거야. 그때 처음 생각했어.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람은 만나지 말자고. 설명과 시간과 노력은 다정한 사람들에게 쓰자고.
내가 가진 작은 돈이 미터기에 뜰 때 기사님은 조용히 미터기를 끄시더니 집앞까지 말없이 데려다주셨다. 집에서 돈 가져올게요 다급히 말하자 “다시 없을 청춘이예요. 잘 보내세요.”하고는 슝 떠나셨다.
봄바람이 불던 밤, 골목 끝에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서있던 스무살의 어느 날.
대학땐 술취한 여자애들을 주무르려는 선배들을 제치고 집까지 업어 데려다줬었다. 원치 않은 이가 손목을 잡으면 세차게 뿌리칠 수 있었고 뺨을 맞은뒤 때린 이를 쳐넘길 힘이 있었다.
지금은 혼자서도 가구를 잘 옮기고 왼손으로도 드릴질을 잘한다.여자에게 쓸데없는 힘이란 없어.
경찰이 나타나자 할머니는 뭔가 번쩍 정신이 든 사람처럼 울기 시작했어. 찾아갈 방앗간도 없고 이모도 돌아가셨고, 자신도 고등학생이 아님을 깨달아버리자 방금까지 소녀같은 표정이 갑자기 노인의 얼굴이 되어버렸다. 낮잠에서 깨니 70살이 된 소녀처럼 울면서 할머니는 경찰차를 타고 가셨다.
약국 단골 중에 자식들 반대로 결혼/동거를 못하고 연애만 하시는 노인커플이 있었어. 늘 손꼭잡고 사랑에 빠진 눈으로 오셨는데 어느날 할아버지만 오셨어. 할머니는요,하니 갑자기 울먹이셨어. 교통사고나서 입원했는데 자식들이 어딘지 안 알려줘서 못보러간다고, 5일째 속이 탄다며 엉엉 우셨다.
내 삶의 일부는 아들보다 나은 딸임을 증명해보이기 위한 전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의 르망을 깨부수었고 부모님의 남은 생을 평화롭게 하는 것으로 이 전쟁을 마무리하려한다.
그들의 몰락에는 관심없다. 어떤 전쟁은 그저 내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니까.
32살때 42세 약국장님한테 그런 질문을 했었어. 살아보니 몇살이 제일 좋았나요.
그 때 내 눈에 국장님은 딱히 멋져보이지 않고 우아하게 꾸미지도 않고, 술도 안먹고 친구도 안만나고 그냥 일집일집이 전부인 것 같았거든. 그래서 과거의 어느 나이를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곰곰 생각하시더니
약국 바닥 청소를 할 때마다 느껴. 절대 민폐 안 끼친다는 사람들도 다 어딘가에 머리카락을 흘리잖아. 흘릴 머리가 없어도 안 좋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고 신발에 묻혀온 껌을 자기도 모른채 바닥에 다 바르기도 하고. 사람은 각자 인식하는 것보다는 민폐를 끼치고 사는게 아닐까 싶은거지.
지방 작은 병원에서 일할 때 연휴시작날에 음독으로 10대 학생이 실려왔어. 해독약을 거의 하루내 고용량 맞아야는데, 우리가 가진건 1시간 분량이 전부였다. 주치의는 약을 구해달라했고 약제과는 주변병원에 전화를 돌려서 십시일반 약을 모았고, 행정부장 원무팀장 부리나케 차를 몰고가서
그날 도와준 선배들, 참혹하던 날의 은인이었던 그들과 연락하지 않는다. 어떤 시기를 기억에서 지운단 건 고맙던 이들도 함께 지운다는 뜻이다. 혼란한 시기의 사람은 많은 관계를 제 손으로 망쳐놓고 제 발로 고립의 굴에 기어들어간다. 나는 그 굴에 혼자 누워서 그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했다.
오늘 약국 앞에 고양이가 햇빛을 쬐고 앉아있었다. 몇년동안 이 동네에서 본 유일한 고양이. 약을 기다리던 남자가 쫓을까요?하길래 기겁했다. 왜 쫓느냐 정색하니, 캣맘들이 밥을 많이 줘서 벌레가 꼬이고 새를 다 죽인다고 했다. 유튜버 하나가 열어버린 혐오의 스피커를 이렇게 본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 눈에 보이는 사랑이 전부라 느끼고 살지만, 등 뒤의 안개같은 입자들을 다 합치면 결코 적지 않을거야. 고요해보였을 학생의 병실과 그 고요를 만들려 숨가쁘던 목소리, 연신 울리던 전화벨, 엘베를 기다리지 못해 7층을 뛰어올라온 간호사샘의 발걸음같은 입자들.
나는 자기 심장처럼 아끼던 반려동물을 잃은 뒤 비탄에 빠져있다가도 안락사 공고를 지나치지 못하고 입양해 알콩달콩 아끼며 사는 집사님들을 좋아한다. 거대한 사랑을 잃고도 다시 사랑에 빠지는 이들을 좋아한다. 이러나저러나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사랑으로 채우는 용기는 대단한 것. 축하해요.
아가, 엄마는 내 대학 친구야. 필기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야. 수영을 좋아하고 계획없는 여행에 흔쾌한 사람이야. 하얀 치마가 잘 어울리고 작은 농담에도 잘 웃는 사람이야. 니가 보게 될 사람과 많이 다르겠지만 그런 사람이었단다,라고 아기에게 속삭이는데 어쩐지
내가 눈물이 펑펑 났어.
할머니에게 부탁을 해보자,하고 찾아감. 할머니는 빵터지시며 오케이오케이 하심. 친구는 며칠 뒤 목욕(?)을 위한 준비를 해서 찾아왔고 나는 거품내는걸 알려줬어. 한시간 뒤에 발그레한 얼굴로, 천국에 다녀온 표정으로 친구가 나옴. 우리 셋은 벽난로앞에 앉아 할머니가 구워준 애플파이를 먹었어.
비뇨기과 근처 약국에서 일할 때 매달 비아그라 시알리스 등 발기부전치료제를 30개 넘게 받아가던 젊은 남자가 있었다. 매일 먹어도 남을 수량이라 이걸 매일 드시냐 물었더니 남자가 말했다. 영업사원이라 접대 때 여자와 약을 같이 공급해야 한다고. 자신의 영업팁이라며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아주 오래전에 문을 닫은 극장이었어.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 생각이 들어 얼른 약국에 있던 빵과 두유를 드시게 했어. 식사를 못하셨는지 너무 맛나게, 그 와중에도 소녀처럼 수줍어하시며 드셨어. 할머니의 양해를 구해 가방 안에서 수첩과 약봉투를 찾았지만 보호자의 연락처는 없더라고.
고등학교때 담임은 의욕이 많고 수업을 잘하는 젊은 남자수학선생이었다. 여고에서 이러면 인물 무관 인기가 많은 법. 반 분위기도 좋았고 다른 반 친���들은 우리반 부럽단 얘기를 참 많이 했다. 우쭐함이 가신건 수학여행에서였다. 담임이 짧은 스커트를 입고온 친구를 지도하다가 뺨을 때렸다.
약국에 와서 남자가 감기증상 얘기해. 열나냐 물어보면 남자는 같이온 여자를 봐. 여자는 안절부절하다 남자에게 귓속말을 해. 얘 열난대요,라고 남자가 전해줘. 약 주면 여자가 뾰로통한 얼굴로 남자에게 귓속말을 해. 얘 알약 못 먹는대요, 남자가 말해.
5세 아동도 이러지 않는다 뭐가 문제냐 대체
비슷한 일 있었음..
널널한 역 앞 카페에서 친구 기다리고 있는데 여자가 오더니 남은 의자를 가져가고 싶은지 한참을 내 앞에서 안절부절 끙끙댐..
그래서 ;; 하고 쳐다보니까 말은 안해 한숨 푹 쉬고 남친 오니까 씨잉..히잉..끼잉...하고 리얼 말도 안하고 한참을 날 째려보고 남자가 달랫음..
+많은 분들을 빡치게 하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그 일은 조상이 계란의 탈을 쓰고 저를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여러분 앞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조상이다 생각하시고 모든 노력을 멈추세요. 아끼는 후손을 지키러 무거운 몸 일으켜 식자재의 탈을 쓰고 나타난 조상 맞습니다.
약국을 여니 20년 안만난 늙은 친척들의 연락을 받는다. 모르는 번호들이 뭣뭣을 싸게 줄 수 있냐 묻는다. 거긴 바가지가 심해 36000원이나 한단다. 전 48000원에 파는데,라고 답한다. 연락이 끊긴다. 몇천원 아끼자고 염치불구한 전화를 하는걸 보면 당신은 잘 살고있지 않다.
약을 받아왔어. 도착하는족족 환자에게 약이 들어갔고 그날 해독을 마칠 수 있었어. 며칠뒤 여러 샘들이 그 학생 오늘 퇴원해요.라고 얘기하는데 그 표정들이 어찌나 뭉클하던지. 얼굴도 모르는 학생의 퇴원약을 지으며 잘 살아라 아가, 다시 이런 식으로 병원에 올일 없길. 기도했었어.
그 때의 내가 딱하다. 술을 많이 마셔서, 종종 창문을 열어놓아서, 담배를 피워서, 밤늦게 놀다와서, 나의 과오에 탓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인지하게 되었다. 그렇다하여 남의 방을 침입할 생각을 하는게 훨씬 비정상적인 사고임을, 내 과오가 아님을.
난 지금이 좋은거 같아, 하시는거야. 띠용한 내가 왜요???물으니 음. 20대엔 너무 가난했고. 30대엔 하고싶은게 많은데 해낼 능력이 없어 힘이 부쳤어. 지금은 마음 먹으면 해낼 능력이 있고 그럴 바탕을 만들어놓았어. 자기도 지금 30대가 참 좋을텐데 40대는 더 좋아. 안 믿기겠지만 진짜야.
그때 내눈엔 그분이 하나도 안 멋져보여서 아 예 하고 말았지. 근데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남더니 40대가 되어서야 알겠더라. 나에게 나이듦을 기대하게 만든 처음 사람이었는데 책에서 백번 읽은 것보다 실제로 겪은 이의 목소리를 들은게 훨씬 단단하게 남은거 같아. 지나고보니 은인이었다.
그전에 나는 한 직장에 6개월을 못 다녔다. 퇴직금 받으려 1년 채우려다 우울증 걸려 관두고. 그런 내가 십년쯤 잘 다닌건 저런 이유였을거.
퇴사 후 가끔 연락을 드리면 70넘은 노인이 오랜만이예요 약사님,하며 꼬박꼬박 존대하신다. 어떻게 늙어야할까 생각할 때 늘 1순위로 떠오르는 나의 멘토.
내가 뭔가 잘못해도 내 편이 있단걸 가르쳐준게 애인이었고 이후의 애인들이었다. 지금은 간장 한병을 쏟아도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 되었는데 이것이
소모적이고 부질없기만 한 것 같던 연애의 결과물이라는게 참 기묘하고 좋다.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족쇄를 끊어준 한때의 사랑들.
대학병원 앞에서 일할 때 아기의 비아그라처방을 조제할 때가 많았다. 폐동맥 혈관수축방지목적으로 아주 작은 용량이 처방되었는데, 깨 한톨 분량이 한포한포 정확히 들어가게하려 아기 한명의 약을 한 시간 넘게 지었다. 그한 알에 기대어 사는 수많은 아기들이 있음을 그 때 알았다.
약국을 열었을 때 차비를 빌려달라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노숙자 노노 멀쩡히 생긴 이들이 전번도 주고 갔지만 알고보니 다 본인이 아니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다가 점점 내가 마상을 입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라 생각했던 날 처음보는 젊은 남자가 차비를 빌리러 왔다.
나는 이사를 했고 모든 연락을 끊었다. 일은 그렇게 일단락된듯하나
그 날 발에 밟히던 돌조각들과 혼자 덩그러니 서있던 계단의 촉감이 지금껏 생생하다. 왜 처벌을 원하지 않았을까 불쑥 화가 날 때가 있다가도, 그 날의 내 마음 역시 한편 이해한다. 스물 둘의 내 용기는 그정도였고 지금의 나는
그간 빌려준 차비는 한 번도 돌아온 적 없으나 이제 마지막이니 상관없었다. 전번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나 그는 전라도oo의 초등학교 선생이라며 전번과 블루투스 이어폰을 건네었다. 나는 전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흘후 그가 찾아왔을때 못 알아보았다. 봉투에 넣은 2만원을 건넬 때까지도.
그다음 명절 아침에 다같이 식사를 하다가 비슷한 얘기가 나오자 아버지는 상을 던졌다. 다시는 아무도 오지말라고, 이 집 대는 여기서 끊을테니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했다. 이후 우리는 처음 평화로운 명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식혜 갖고오란 삼촌도 없고 설겆이대신 피아노만 치던 숙모 없이.
니가 맞은 것도 아니면서 왜 설쳤냔 질문을 수없이 받았었다. 아마도 오랜 기간 보아온 폭력, 친구들이 맞는 걸 보고만 있었던 무력감의 누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엔 담임보다 폭력적인 교사들이 넘쳐났고, 폭력의 피해는 그 폭력앞에 침묵했던 이들에게도 싸락눈처럼 쌓여갔다.
+학생들의 요구는 담임이 이 학교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직서를 냈으나 앞날이 창창한 가장이라는 이유로 교장교감이 반려했다. 학교측의 비난이 학생들에게 돌아왔고 학부모들을 소환하며 압박했다. 협상은 없었다. 이렇게 저항해도 아무 달라진 것 없이 2년이나 지나갈 줄은 몰랐다.
그는 흡,하고 소리를 내나 싶더니 온 눈가가 벌겋게 되었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라고 말하며 그가 울었다.
여러번 사표를 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지옥같은 2년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도. 나는 졸업식날 그에게서, 그가 다시는 누구의 뺨도 때리지 못하리란 걸 보았다. 그것으로 끝났다.
나이가 더 들면 나도 배척당할 거야. 공간의 성격과 맞지 않다거나 내 연배 사람들이 끼친다는 민폐를 이유로. 폭력적인 배척이 아니어도 읽지 못할 간판, 주문부터 막히는 장치도 비슷한 얘기. 사람은 모두 아이였고 결국 늙는다는 것을 잊게 만들면 우리가 그림자에서 사는 날이 온다.
내가 대학 2학년때 삼촌이 뇌경색으로 몸반쪽이 마비되었다. 엄마가 문병을 가라해서 나는 몇년만에 삼촌을 보았다. 숙모는 나를 반가워하며 나이드니 같이 여행다니는 딸있는 사람이 부럽더라, 너랑 나랑 엄마딸처럼 지내자했다. 나는 다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엄마에겐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니 어릴 때 내가 얼마나 예뻐했는데,라는 노인도 있었다. 무려 많더라고. 그렇게 아낀 이들이 많았는데 왜 내 책가방은 6년내내 똑같고 늘 빵꾸가 나있었을까.
맘으로 아껴놓고 돈으로 받을 생각은 마십사.
모내기도 안해놓고 추수할 생각은 마십사.
숟가락은 자기밥그릇에만 얹으십사.
긴 시간이 지나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모두를 만났을 때, 사촌오빠들은 할머니 제사에 난색을 표했다. 대를 이을거라 유산은 모두 받아갔지만 제사는 안된다고 했다. 삼촌은 그렇게 답하는 아들들이 부끄럽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지우개와 르망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외국 출장을 자주 다녔던 삼촌은 어느 명절에 일본에서 선물을 사왔다고 우리를 불러앉혔다. 설레는 우리 손에 건네어진 건 지우개였다. 참 좋은 지우개였지만 그저 좋았으면 30년을 지난 지금도 기억나지는 않겠지. 삼촌은 의도가 있든없든 대체로 이런 식의 모욕감을 선사했다. 차도 마찬가지였다.
초졸에 딸만 주루루 낳은 엄마는 사는내내 구박을 받았다. 설날엔 삼촌 고모네가 몰려와 아들 안낳을거면 이혼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추석엔 사촌오빠와 나를 바꿔서 대를 이으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걸 눈 앞에서 들은 나는 밤잠이 얕아졌다. 엄마가 화장실을 가면 도망가는줄 알고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