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먹고도 멀쩡히 살아 움직였다고."
"하하, 그 정도는 아니옵고... 쓰러지긴 했죠?"
"아무리 큰 짐승도 1분 안에 피를 토하고 죽어버리는 독을 먹고, 쓰러지기만 했다."
"그런 독이었습니까?"
"나를 위해 일해볼 생각은 있나?"
한유진이 눈을 빛냈음. 쓸데없이 결혼도 안 하고 좋은데?
"어떤 일입니까?"
"내가 먹을 음식을 미리 먹고, 안에 독이 있는지 알려주면 되네"
"어..."
난 독저항이 있으니까 죽지는 않을 거고. 독이 있는 건 어떻게 알지
'독저항을 빨리 껐다가 켜?'
남이 알았다면 미쳤다고 화를 냈을 일이었으나 한유진 60대 노인과 결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제일 컸음
"좋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일하는 것으로 할까. 곧 오찬이 준비되니 같이 들게."
"아이고, 마침 배가 고팠는데."
손을 싸바싸바 문지른 한유진이 황제에게 대범하게도 슬쩍 말을 걸었음.
"저어, 폐하. 그래서 이 일의 삯은 어떻게 될런지요."
"나를 아끼는 맘 하나로 일한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 한유진이 잠시 굳을 뻔한 눈매를 풀고 또 손을 샥샥 문질렀음.
"아유. 그건 그렇지만요. 저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하지 말입니다. 집에 토끼같은 동생이! 배를 곪고 있어요!"
"흠."
"이 일 하다가 목숨이라도 잃으면!"
"그래. 목숨값까지 해서, 금화 하나."
"헉."
"한번에."
"헉!"
금화 30개면 수도에 집을 하나 구하는데. 이정도면 상당히 남는 장사였다. 맨날 독이 들어있진 않을 거 아냐!
'내 몸 하나로 이정도면 괜찮은데?'
남이 들었다면 한유진의 등을 때리며 정신차리라고 했을 소리였음.
"식사가 입에 맞길 바라네."
"아무렴, 폐하께서 드시는 것이니 좋겠죠."
식사는 황제의 말대로 향기부터 남달랐음. 집에서 먹는 것도 한국인 입맛엔 영 아니지만,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와..."
"나보다 음식을 더 기쁘게 반기는 것 같네만."
"에이, 그럴 리가요. 어찌 제가 감히."
당연하지. 말한마디 잘못하면 목 날리는 놈이랑은 다르게 영양분도 주는데.
요리사의 긴 설명을 대충 흘려듣고 있으니 황제가 고기를 썰어 소스를 찍었음. 맛있겠다. 육즙이 뚝뚝 떨어져 소스와 섞이는 모습이 아주 군침이 돌았음.
"먹게."
"감사히 먹겠습니다!"
독저항을 잠시 끄고 고기를 받아먹자 주위에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음.
'맛있네. 캬~'
"폐하께서 쓰실 식기를..."
어디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미각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음. 음, 독은 안 들었나?
유독 요리사의 안색이 새파랗다 싶은 순간 목에서 뜨거운 것이 밀려오고, 순간 세상이 노랗게 물들었음.
"컥!"
급하게 독저항을 키고 입가를 닦아내려는데 황제가 말했음.
"정말 죽지 않는군. 믿기 어려운 일이야."
"그게, 헉. 무슨..."
한유진이 급하게 숨을 내쉬었음. 황제가 짐짓 다정한 손길로 그를 일으키더니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주었지.
"바보처럼 아무거나 주워먹고서 독이라 믿은 줄 알았더니만."
이새끼 미친놈인가? 잠시 몸에 들어온 독 때문에 손이 떨렸음.
내가 독으로 죽지 않는다는걸 믿지도 않아놓고 독을 먹여?
"절 죽이려 하신 겁니까?"
"말이 심하군. 자네를 시험한 것뿐이야. 내 곁에 둘 자를 허투루 골라선 안 되니."
살아서 다행이군
이를 꽉 물었음. 이 개새끼. 내가 언젠가 복수한다. 일단 돈 벌어야 하니까 남긴 하겠다만.
"하하, 그러게요"
"독 들었네요. 어떤 놈인진 몰라도 이야, 아주 사람 하나 골로 보내려고 작정했나 본데요?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충고 고맙군."
"인성도 의심될 정도고?"
"그래?"
"하여간 조심하세요."
한유진이 방긋 웃었음. 황제 또한 웃음으로 받아쳤지.
"돈은 한번에 주시려나?"
"소영아."
"네."
"들으셨어요? 작게 말하는 게 참..."
"내 지척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랬나, 아이고. 감사합니다. 음? 말한 것보다 많이 주신 것 같은데."
"선물이라고 생각해주게."
"아, 선물~"
병주고 약주고냐, 이 개자식. 속으로만 그리 생각하고 겉으로는 황제 폐하 짱이라며 추켜세우기 바빴음.
"금화 한 닢이 뱃삯이 되지 않아 다행이군"
"뱃삯이요?"
웬 뱃삯. 배는 탈 일도 없는데. 한유진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봤으나 입을 꾹 다물어 버려 답은 듣지 못했음.
"집은 황궁에서 가까운 편인가."
"수도 내에 있긴 하죠?"
"황궁에 머물면서 일을 하는 게, 그대에게도 내게도 좋을 것 같은데."
"내가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다시 돌아오라 명하는 걸 원한다면야, 말리지 않겠네만. 아마 소영이가 수고해주겠지."
"네에?"
옆에 서있던 금발머리 기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음. 유현이 또래 같은데. 애를 고생시키긴 좀 그렇네.
"알겠습니다. 대신 집을 좀 정리하고 와야겠습니다요."
"마음대로 해."
집으로 돌아가 동생에게는 황궁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만 말했음.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했다간 원래 유현이처럼 나올 것 같단 말야. 집에 갇히는 거 아니냐?
'미안하다 유현아!'
어제 받은 금화를 건네주니 수상쩍게 여기며 나를 추궁했는데, 워낙 일을 잘해서 준 것이라 하니 어찌 넘어가긴 했다.
"한유진 씨 계십니까?"
"예?"
잘만 자고 있던 한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자, 아까 보았던 기사와는 또 다른 기사가 그의 팔을 끌었음. 아니 황궁에는 죄다 금색 머리밖에 없나?
"아니, 왜그러십니까?"
"폐하께서 오늘 내로 황궁으로 들어오라 명하셨습니다."
"예에?"
"형, 무슨일이야?"
뒤를 도니 유현이가 쇠스랑을... 아니, 저걸 왜 들고 있어!
"유현아. 그거 일단 내려놔. 위험한 일 아니야."
"황궁에서 온 사람들이야?"
"어어. 일이 오늘부터였나 보다. 형이 잘못 알았나 봐."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한유진 씨."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기분이었음. 아니, 이 개자식이 진짜!
"갈 테니까 동생이랑 얘기하게 비켜주시죠. 피차 싸워봤자 좋을 것도 없고."
"도망가시면 안 됩니다."
"예에."
한유진이 문을 닫고 한유현을 끌어안았음. 사랑한다, 내 동생! 돈 많이 벌어올게!
"나는, 형만 있으면 되는데."
"우리 같이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일이야. 좀만 기다려주라. 형 믿지?"
"...응."
"그래! 밥 잘 챙겨먹고. 돈 다 써도 돼."
집 문을 열고 나서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음. 내 동생은 아니지만, 내 동생이라서 그런가. 유현이도 분명 어떤 나라 해도 이렇게 대해줬겠지.
"갑시다."
"올라타세요."
"...그, 뒤에요?"
"무서우시면 붙잡으셔도 되고요."
"아뇨! 아닙니다."
황궁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잡치는 것 같았음. 또 사람을 질질 끌고 어딘가로 데려가는데, 문이 거창하게 화려한 걸 보니 누구한테 데려가는 것인지는 뻔했음
"늦었군."
"정리는 하게 해주신다면서요?"
"저녁 식사가 아직이라 마음이 급했지 뭔가. 동생과 인사는 잘 했나?"
"아, 예. 덕분에요."
이 시간에 뭔 저녁 식사. 한유진이 상대를 노려봤음. 그의 앞에는 다과와 차 한 잔만 놓여 있었음.
"그게 저녁이십니까, 존경하는 황제 폐하."
"황궁에서는."
남자가 제 앞을 향해 손짓했음. 앉으라고? 거 되게 배려심 깊으시네. 아주 성군 납셨다, 야.
"물 한 잔도 함부로 마실 수 없거든."
"그러니 이 정도면 큰 연회의 만찬이나 다름 없지."
"아...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아주 조금 쓸쓸해보였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펜트하우스에서 와인잔 들고 제 인생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돈도 권력도 없어서 자다가 끌려나왔는데!
"먼저 들게. 나보다 먼저 음식을 맛보는 건, 아마 그대가 처음이겠지."
"요리사도 맛볼 걸요?"
한참 말이 없더니 그건 그렇군, 하며 말을 이었음. 당장이라도 이 쥐새끼를 어떻게 구워 삶을지 고민하는 얼굴이었으나 신경쓰지 않고 찻잔을 들었음.
'차는 뭔 맛인지 모르겠네.'
그냥, 음. 으음?
독은 안 들어있는 것 같고, 흠. 이번엔 저 빵쪼가리 한번 먹어볼까. 한유진이 조개 모양처럼 생긴 빵을 집어들었음.
'맛있네.'
맛있어서 순간 다 먹을 뻔했다. 아무 일도 없던 척 한입 먹은 빵을 내려놓고 시치미를 떼려는데 웬 웃음소리가 들렸음.
"독 안 들었습니다."
"그래. 맛있게 먹더군."
괜히 찔끔해서 시선을 피했음. 맛이, 그 뭐냐. 없진 않았지. 황궁 요리사들한테는 죄가 없으니까.
'차라리 칼을 찌르면 찌르는 거지, 왜 애꿎은 음식에 독을 타고 난리람.'
한유진의 눈빛이 빵에 돌아오는 걸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황제의 입꼬리가 위를 향했음. 맹랑하게 굴기에 골려줄까 했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