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북부대공과 계약결혼하는 로판에 빙의한 한유진...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서 깨작거리고 한숨 푹푹 내쉬며 자꾸만 창문 바라보고 그랬는데
"그렇게까지 헤어지고 싶은 티를 낼 줄은 몰랐군."
"예?"
"앞으로 3년 뿐이니 참게. 그것도 싫다면, 내가 저택을 나가줄까."
하고 오해로 시작하는 로코
김치찌개 먹고싶다. 아니, 삼겹살에 김치도. 회사 근처에 맛있는 집 있었는데.
한유진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 뿐이었다. 그러니 갑자기 저런 말을 듣자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나가주실 겁니까?"
물론 한유진으로서는 알 바 아니었음. 나가주면 나야 땡큐지. 안 그래도 불편한데.
"하."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해서 내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관심을요? 아뇨. 전 웬만하면 조용히 살다 갈 생각인데."
"그래?"
"네."
이새낀 왜이래. 하기야 그런 맛대가리 없는 밥을 삼시세끼 먹는데 제정신일 리가... 절로 안타까운 맘이 샘솟았다.
"한유진 군, 뻔한 수작은 그만두지."
뻔한 수작이라니. 설마하니 일부러 음식을 남긴 걸 눈치챈 걸까. 아니면 몰래 집에 있는 귀중품을 챙겨서?그, 그것도 아니면.
"그러지 않아도. 남들이 보는 곳에서라면 자상한 체는 해줄 테니 말이야."
"...별로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상대의 눈썹이 위를 향했음. 뭘 노려봐. 김치나 내놔.
"그럼. 요근래 보이는 행동의 이유가 뭔지 설명이 필요하겠군."
"그으, 건 말이죠."
저멀리 내 진짜 고향에 두고온 국밥과 음식들이 그립다고 해야 하냐.
하긴 이 인간도 좀 재수없긴 하지만 원래 있던 남편을 잃어버린 셈이니 약간 미안하기도...
"말할 거리를 생각중인가."
아니. 안 미안하다.
솔직하게 인정하라는 듯한 저 눈빛이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주고받지 못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해하네만."
"아, 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예상 외군. 얌전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
"아, 네."
"...아직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아, 네."
남자가 드디어 입을 다물었음. 원래 있던 놈이랑 다른 놈이라고 느끼지 않을 만한 대답은 뭐가 있지
"죄송한데. 제가 그쪽, 그러니까 공작님을 좋아하긴 했던 것 같네요."
"했었다?"
"이젠 아닙니다. 강산도 변하는데 하물며 사람 맘은 어떻겠습니까. 예?"
"아무 마음도 없다. 그 얘긴가?"
"그런 셈이죠."
"왜 다른 사람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지?"
"......"
다른 사람 얘기니까. 그가 딴청을 피웠름.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얼굴을 찌르는 듯했음.
근데 저새끼 표정이 왜저러지. 설마.
"일단 넘어가도록 하겠네. 이 얘기는 다음에 하는 게 좋겠군. 슬슬 저녁 때이니."
"아니, 뭔."
뭘 일단 넘어가, 임마!
어이가 없으면 말도 안 나온다고 하던가. 그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음. 한유진이 뒷목을 잡는 동안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았음.
"식사가 입에 맞는 것 같지 않아서, 요리사를 바꿨네."
"아, 그러십니까."
"저녁 때 보지."
요리사를 바꿔도 요리는 그대로일 텐데...
이번에도 맛없는 티 내면 요리사가 또 바뀌는 거냐. 미안해 죽겠네. 그 사람들도 힘들겠다. 하여간 이 인간이 제일 문제라니까.
그리고... 저녁 때는 찾아오고야 말았음.
"음."
맛없다! 맛이, 아주 없는 건 아니고. 참... 이국적이라고 해야 하나. 돈을 들인 음식인 건 분명했음.
"입에 안 맞나?"
식탁 앞에 선 요리사의 볼이 씰룩였음. 요리를 바라보는 두 눈에 자긍심이 느껴졌음. 저 얼굴을 보면서 음식 평가를 하라니, 저새낀 푸른피가 흐르나?
"입에 잘, 맞네요."
"그럼 더 들게. 요즘들어 살이 많이 내렸군."
"네엡."
진짜... 신기한 맛이다. 향신료가 정말 가득하네.
요리사를 위해 그날부터 약 석달간 열심히 음식을 먹어왔으나 결국. 한유진은 견디지 못했음.
이대로 살다가는 사람이 미친다!
자극적인 맛이 좋다고 했더니 향신료를 세 배로 넣어주질 않나!(물론 마음만은 친절했다) 성현제 저 놈은 계속 적게 먹는다고 트집을 잡질 않나!
"오늘 저녁 안 먹어요."
그 말에 외출복 그대로 휴식을 취하던 성현제가 그를 지그시 바라봤음.
"요리사를 바꿀까?"
"그걸 협박으로 쓰지 마시죠."
"이런, 그럴 리가. 나는 단지 한유진 군이 더 맛있는 식사를 하길 바랄 뿐인데."
퍽이나 그렇겠다. 그냥 괴롭히는게 재밌는거면서.
'그렇지만도 않은가?'
잘 챙겨주긴 했지.
음식 깨작거리면 걱정되니 더 먹으라며 접시에 담아주고, 디저트까지 챙겨주고... 디저트는 맛있더라.
'배부르다고 했는데도 준 거면 그냥 괴롭힌 건가?'
한유진도 그를 만만찮게 노려봤음.
"그리고 우리 각방 쓰죠. 슬슬 신혼도 끝날 때가 되지 않았나."
"정말, 재밌는 성격이 되었다니까.'
"제가 그쪽 이름을 자면서 불렀다고요?"
"몇 번이나 되물을 만큼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충격적이지. 그것도 엄청. 그러고보면 어젯밤 꿈이 흉흉했던 것 같기도 한데... 혹시 저 인간이 나왔었나.
"여하튼, 뭐. 됐고요. 각방 씁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뻔하군."
"이런 거짓된 인생을 살면 삶이 행복하겠어요?"
"나는 꽤 행복하던데."
"아, 그렇군요. 좋겠네요."
남 괴롭히며 즐거움을 느끼는 놈들은 문제가 있어. 물론 괴롭힘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괴롭힘이지만. 뭐라고 할 건데.
남편이 자꾸 마르지 말라며 음식이랑 간식을 챙겨주고요, 각방 쓰지 말자네요.
그럼 지금 자랑하는 거냐며 욕이나 먹겠지.
'난 애초에 이자식 남편도 아닌데!'
그래서 더 민망하단 말이야! 물론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이름은 똑같았다만. 얼굴도 비슷하고. 그래도 남의 남편이랑 붙어있긴 좀, 좀 그래!
"그래요. 어차피 2년 하고 반 남았으니 참겠습니다."
"흠."
"또 왜요."
"아무래도 저녁은 같이 먹는 게 좋겠군."
"예?저 오늘은 속도 안 좋고..."
"같이 먹는 것으로 알지."
갑자기 기분나쁜 티를 내더니 먼저 방을 나가버렸음. 뭐야, 진짜. 또 왜저래. 한번 저렇게 삐치면 적어도 이틀은 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식사는 유독 향신료 범벅이었음.
성현제가 요즘 얌전하다.
저 인간에게 이런 표현을 쓸 날이 오다니. 정말 얌전하고, 조용했다. 심지어 요즘은 향신료가 덜한 음식을 앞에 두기도 했다!
'먹다보니 그럭저럭 적응해서인지 이제 먹을 수는 있다만.'
안 그러던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하면 죽을 때라던데. 죽으면 돈은 내 건가.
신경써서 뭐해.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그 인간 걱정이지. 애초에 걱정도 아니었고.
처음으로 저택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향이 풍겨왔음. 매콤하고, 칼칼한 이 냄새. 그래 마치 김치찌개 같은 냄새가!
"어!"
벌컥, 부엌 뒷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음. 부엌 담당하시는 분이네.
그 뒤로도 한유진과 그 시종은 종종 만나 음식을 나눠먹곤 했음. 저택 내에 그가 웬 시종 하나와 바람을 피고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금방이었지.
그리고, 그 소문이 성현제의 귀에 들어간 건 벼락이 떨어지는 것보다도 빨랐음
"통 먹질 않는군. 그런데 오히려 살집은 올랐고."
"...욕하는 겁니까?"
"간식을 많이 먹은 건지, 다른 곳에서 음식을 먹고 온 건지."
"...원래도 이정도 먹었습니다."
"아니면 사랑에 빠져서 그런가."
"큽! 콜록, 켁."
한유진이 술을 벌컥 들이켰음. 대, 대체 뭔 이야길 들었길래 저래. 남자의 얼굴은 태연했음.
"한유진 군. 불륜을 저지르려면 들키지는 말아야지."
"그게 무슨."
정말 음식만 먹었단 말야. 아니, 근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럴까? 남편이랑은 소홀하고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이랑 화기애애하게 한 방에서... 제기랄.
"...오해할 만한 상황인 건 맞네요."
"오해라. 한유진 군이야말로 본인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뭐, 뭔."
물론 밥 같이 먹으면서 정이 들긴 했다만. 그 분은 우리 유현이 나이대이신데! 아니. 그보다 더 어릴지도 모르지.
"됐네요. 제 맘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나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던, 그 말도 확신하는 건가?"
"아, 그건 최고로 확신하죠."
"이것도 먹게. 주방장이 힘을 쓴 모양이니."
이새끼가... 한유진이 억지로 웃으며 음식을 입에 넣었음. 하, 김치찌개 비슷한 그거 또 먹고싶다. 저번에 고기 넣어서 먹은 것도 최고였지
그가 저도 모르게 창밖을 아련히 바라보자 성현제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음.
"그자를 마음에 둔게 아니라니 안심이군. 이번달 내로 고향에 내려간다던데."
"...먼저 들어가 볼게요."
"한유진 군."
"예."
여유로운 모습으로 앉아있는 남자가 또 와인을 홀짝였음. 행동만 보면 초조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음.
"태도를 확실히 하게. 괜한 사람이 피를 볼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뭘 더 확실히 하라고. 한유진이 인상을 팍, 찌푸리고 밖으로 나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