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진은 억울했다. 어느날 눈 떠보니 갑자기 고양이로 변해서 본능에 따라 충실히 살았을 뿐인데 사생팬이라니. 그러길래 누가 배고픈 고양이한테 츄르를 주랬냐.
"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네. "
" 키야웅! "
안돼! 한유진이 비명을 지르다 말고 제 입을 꾹 막았다. 뭐, 뭐야. 왜이래.
" 정말 유진이, 너란 말이야? "
" 엥. "
차라리 잘 됐다. 생각보다 쉽게 믿어줄 것 같은데. 한유진이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간 몸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곤 성현제의 발 위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아 참. 나 이제 인간인데.
" 그럼, 밥은 뭘로 먹여야 하나. "
" 웩! "
츄르는 안 돼! 절대 안 돼! 캔도 싫구, 고양이 사료도 싫어!
고양이일 때는 맛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먹을 수 있는 게 못된다. 한유진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인상을 찌푸리니 성현제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 아무래도 속 안에 든 건 고양이일테니, 평소처럼 줄까. "
" 에엥. "
성현제의 눈빛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주인, 아니지. 저 자식 나 의심하고 있는 거 아냐? 한유진이 울며 겨자먹기로 눈을 빛내며 얼른 츄르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아직 기억도 불완전하고, 몸도 이 모양이니 어쩔 수 없지. 조금만 더 신세집시다 이 양반아.
우리 그동안 잘 지냈잖아 그쵸.
뒤따라 오던 성현제가 한유진이 앉아있는 곳을 보더니 피식, 하고 웃었다. 자기 간식 넣어둔 곳은 또 어떻게 알고. 성현제가 습관처럼 유진이의 코를 살짝 두들겼다.
" 밥도 아직인데 벌써 간식부터 찾으면 안 되지. "
" 웨옭. "
" ... 식탁에서 먹을 순 있나? "
그러네. 바닥에서 먹어야 하나.
한유진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성현제가 고민하다가 식탁 위에 밥그릇 두 개를 올려두고 오트밀 시리얼을 부었다. 아무래도 사료와 비슷한 음식을 주면 더 잘 먹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 유진아. 올라와. "
" 웽. "
습관처럼 탓, 하고 점프를 하다가 그대로 의자와 함께 넘어가 버렸다.
어? 뭐야, 뭐지. 평소엔 잘 됐는데.
" 유진아! "
" 웨엥... 에엥. 엥... "
아니 점프 못하는 고양이가 어딨어. 뭐야 이게. 한유진이 황망하게 제 몸을 내려다 보다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 맞다. 나 지금 사람이지.
" 안 되겠군. 일단 옷부터 입고. "
응? 옷?
마, 맞다. 사람은 옷도 입고 다니지. 하도 털로 뒤덮여 있었더니 깜빡했네. 그제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한유진이 제 몸을 후다닥 가리다가, 그대로 남자의 품에 안겨 옮겨졌다.
" 맞는 옷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
으음. 하긴 성현제가 인간 중에서도 꽤 큰 편이지. 근육도 장난아니고.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앉은 한유진이 자꾸만 물건들을 툭, 툭 건드렸다. 성현제가 안 돼, 유진아 안 되지, 하고 말려봤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한유진을 말릴 순 없었다.
" 웨엥. "
" 옳지. 이제 밥먹, "
한유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우유병을 툭, 쳤다. 그래도 낙하할 뻔한 병을 붙잡은 성현제가
표정이 굳었다. 삐졌나? 배고플 텐데. 성현제가 미안하다고 달래다가 노선을 바꾸었다.
" 간식? 간식 먹을까? "
" ... 엥. "
내가 인간 짬밥이 있지 고작 간식에. 한유진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성현제가 한유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달래자 한유진이 그르릉 소리를 냈다.
" 화 풀렸나? "
" 웨오옭! "
" 미안해.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
성현제가 눈치를 보다가 서랍으로 걸어가 얼른 츄르를 가지고 왔다. 한유진이 꼬리를 흔들며 눈을 초롱하게 빛냈다. 츄르!
츄르? 가만, 내가 츄르를 먹어도 되나... 그러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봉지를 뜯은 순간
성현제도 봉지 끝에 묻은 것을 핥아먹더니 확 인상을 찌푸렸다. 비려. 쓰레기통에 츄르를 버리고서 한유진에게 물컵을 들이밀었다. 킁, 하고 냄새를 맡은 한유진이 조심스레 물을 할짝였다.
" 당장 다음주부터는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라, 집을 비우게 될 텐데. "
" 웨옹. "
촬영?
맞다, 성현제 티비에 나오는 사람이었지. 종종 영화를 틀어주던 게 기억났다. 한유진이 물을 잘 마시지 못하자 살짝 얼굴을 붙잡은 성현제가 조심스럽게 물컵을 기울였다.
꿀꺽, 이렇게 물을 마시는 게 오랜만이라 사레에 들릴 것 같은 아슬한 기분으로 물을 삼켰다. 캬, 시원해.
" 웽. "
사람일 때도 고양이일 때나 다름없군. 조심스럽게 턱을 긁어준 성현제가 여상스레 물었다.
" 촬영장에 같이 갈까? "
" 에엥? "
한유진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기겁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성현제 미쳤나? 나 데려갔다가 촬영장에서 미친 사람 돌아다닌단 소문 나면 어떻게 하려고.
" 차에만 얌전히 있으면 되겠지. 그다지 추운 날씨도 아니니까 잘 입혀서 데려가면... "
" 웨옭. "
말도 안 돼. 그러다 댁한테 이상한 소문 돈다니까요. 한유진이 웨옭, 웩, 하며 열심히 설명을 해봤지만 성현제의 표정은 굳건했다. 데려갈 마음을 먹었는지 벌써 딴 세상에 가 있었다.
" 모습은 사람 모습이니 누구에게 맡길 수도 없고, 애초에 남의 손을 타게 하는 건 별로라. "
" 웨엑. 앵. "
맞아, 댁 그래서 청소며 요리며 다 혼자 하잖아요.
" 다른 사람한테 맡길 생각 없어. "
" 엥? "
" 그래. 데려가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매니저 입만 단속하면 그만인 걸. "
" 에에엙. "
하긴. 다른 사람한테 맡겼다가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될라. 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고양이마냥 꽉 주먹쥔 제 손을 억지로 펴서 성현제의 소매를 붙잡았다.
" 웨옹... 웱. "
나만 믿으쇼, 성현제 씨. 제가 특별히 차 안에 얌전히 있을 테니까 촬영 얼른 끝내고 갑시다.
쥐어주니 곧잘 붙잡고 있는다. 확실히 똑똑하긴 하군. 자기 이름을 바로 알아듣는 것도 신기했었지. 반면 한유진은 입으로 먹는 척을 할 필요가 없어 감격에 빠졌다. 다행이다, 내 조금이나마 남은 인격을 지킬 수 있어서.
" 잘하네. "
" 엥. "
어유, 민망해. 숟가락 잘 잡는다고 칭찬 듣긴 처음이다
한유진이 테이블 위에 흥건히 흘리면서도 성현제를 따라 숟갈을 입에 넣는데에 성공하니, 그가 박수라도 칠 기세로 활짝 웃었다.
" 누가 보면 정말 사람인 줄 알겠어. "
" 엙, 켁. 콜록. "
" 이런. "
겨우 의자에 앉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유진의 등을 두들겼다.
" 물. "
" 에엥, 콜록. "
어찌저찌 밥을 먹는데에 성공하고 오트밀 범벅이 된 한유진을 끌어 성현제가 화장실로 데려갔다. 가까워진 얼굴에 고양이일 때는 느끼지 못한 날 것의 미모가 심장을 찔러왔다. 와, 잘생겼다.
" 웬일로 얌전히 있으실까. "
이제보니 얼굴에 홀린 사이 저를 욕조 안에 넣은 모양이었다.
성현제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유진의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리는 게 아닌가.
" 내가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 건지, 아님 고양이가 사람 말을 하는 건지... 유진아. 한 번 더 말해보겠나. "
" 웨, 웨옹. "
" 평소랑 목소리 톤이 다르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