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윶 로판클리셰로 괴물 공작과 계약결혼하는 한유진...
전생에서는 성현제의 싸늘한 방치 속에 외롭게 죽어갔지만, 이번 생에는 그를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음
" 계약결혼? "
" 네 공작님.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
" 말해봐. "
한유진이 웃으며 덧붙였음
" 절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 "
피차 서로 이해득실에 따라 결혼한 것이니 거절할 일 없는 제안이었지. 성현제도 그렇게 느꼈는지 의외라는듯 고개를 끄덕였음
"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되나 보군. "
" 소문이라뇨? "
" 그대가 날 열렬히 사모한다는 소문 말이야. "
그 순간 한유진의 심장이 내려앉았음
" 누가 그딴 헛소릴.. "
" 아... 그거요? "
성현제는 자신과 결혼한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방에서 잠든 적이 없었음. 다른 사람을 불러와 저택 내에서 난잡하게 놀기만 했지.
" 말만 결혼이지, 솔직히 사업이나 다름 없잖아요. 저는 공작님께서 첩을 들이시든, 누구랑 밤을 보내든 신경 안 씁니다. "
" 하. "
성현제가 헛숨을 뱉었음. 이어지는 날카로운 눈빛에 한유진이 잠시 숨을 멈췄음. 용의 피를 지녔다 했던가.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 그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겠지? "
" 그... 렇죠? 공평해야 하니까. "
" 그렇다면 이 조항은 없애지. "
한유진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음
" 예?! "
" 결혼에는 동의하지만, 계약서는 조정해야 할 부분이 있겠어. "
" 음. 그럼 다음주 이 날에 만나서- "
" 내일 시간 되나? "
한유진의 머릿속이 잠시 생각을 멈추었음. 뭐라는 거야 이 인간.
" 내일은 왜... "
" 결혼할 사이인데 식사 정도는 괜찮지 않나. "
그건 그렇지.
" 난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좋겠어. 솔직히... 이 결혼도 반대하고 싶어. "
" 괜찮아. 내가 결혼을 해야 정식으로 작위를 승계받으니까 "
3년 뒤면 이혼할 생각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한유현의 표정은 펴질 생각을 않았다
" 꾸밀 필요는 없잖아. 그 놈이 뭐라고 했어? "
" 아니, 그런 거 아냐! "
꾸미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잘난 놈 옆에서 추레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였다. 속이야 어떻든 껍질 하나는 끝내주니까
" 괜찮으니까 형만 믿어 "
" ... 응 "
전생에서는 유현이와의 사이도 안 좋았었지. 한유진이 활짝 웃었다.
" 걱정할 일 없게 할게. "
그 결심이 무너진 건 순식간이었다
' 저거 진짜 순금인가? '
황궁 요리사였다는 사람이 차린 레스토랑은 낮에는 차를 마시는 담화의 공간, 밤에는 술과 요리를 곁들인 만남의 장이 되었다
" 늦었군. "
" 정시에 도착했으면 됐죠. "
성현제가 팔을 내밀었음.
" 에스코트는 됐어요. "
" 결혼할 사이에 야박- "
" 뭐라는 거예요! "
그 쪽 안부를 왜요. 어련히 잘 지내셨겠지. 한유진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온 걸 확인한 성현제가 잔으로 웃음을 가렸음.
" 아... 예. 잘 지내셨어요? "
" 잘 지내지 못했지. "
" 왜요? "
" 계약서 내용을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고심했거든. "
결국 일 얘기 맞네. 한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음.
"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나오셨는데요? "
" 궁금한가? "
한유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음. 때마침 애피타이저가 나왔지.
" 아무리 계약혼이라지만. 나는 내 결혼 상대가 다른 사람이랑 뒹구는 모습을 두고볼 수는 없어. "
" 푸흡! "
" 이런. 조심해야지. "
감히 자기가 저런 말을 해?
한유진의 눈초리가 뾰족해졌음.
" 그 전에 잠깐. "
성현제가 자신의 접시와 한유진의 것을 바꾸었음. 이건 또 무슨 짓이람.
" 뭐예요? "
" 요구사항과 반대로 나와서. "
" 무슨 요구사항인데... "
한유진이 성현제의 수프 위에만 올라간 허브를 살폈음. 쓴맛으로 유명한 허브였음.
' 내가 저걸 싫어하는 줄은 어떻게 알고? '
한유진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성현제가 의외로 어색한 표정을 지었음.
" 어떻게 알았냐고는 묻지 말게. "
" 안 물어볼리가요. "
"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적은 처음인데. 그저 감이었어. "
당연히 믿을 수 없었지.
" 다른 사람들은 밭에서 나는 재료를 먹으면 노동자들과 똑같다고 보더군. "
" 그런 게 어딨답니까. 음식은 음식이지. '
" 나도 동감이야. 그런 논리라면 이 요리를 만든 자가 황제 폐하의 요리사였으니... "
한유진이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은 한산했다.
" 말을 아끼셔야죠. "
더 걱정해야 할 성현제는 오히려 웃기만 했다.
" 식전주를 괜히 뺐군. 술이 들어가면 더 진솔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텐데. "
" ... 공작님 앞에서 경솔한 짓을 할까 두려운데요. "
" 그런 부분까지 감싸 안는 것이 부부겠지. "
" 사업인데 그런 건 필요없습니다. "
" 이런. "
' 대체 왜 저러는 거야. '
한유진은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수프를 떠먹었다. 안타깝게도 버섯의 오묘한 향과 고소한 크림이 어우러진 수프는 제 입맛에 딱 맞았지.
" 입에 맞나 보군. "
" 아, 네. "
" 버섯 포타쥬가 연인 사이에 먹기 좋다고 들었거든. "
한유진이 망설이다 물었음.
성현제가 스푼을 내려두고 입을 두들겨 닦았음.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묻어났지.
" 우선, 우리 두 사람 관계 안에 다른 사람이 끼는 경우는 없었으면 하네. "
" 첩, 같은 거요. "
" 정확히. "
" ...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기만 하는 건요? "
" 부적절하군. 그것도 금지조항에 추가하지. "
한유진은 성현제가 자신에게 저질렀던, 몇은 그럴 의도가 없었을 테지만 결국 상처 입었던 그 일들을 떠올렸음.
" 무도회에서 서로의 파트너가 되어야
하나요? "
" 물론이지. "
" ...파트너를 두고 떠나지도 않구요? "
" 그 정도는 예의 아닌가. "
" 말도 없이 몇 년 동안 떠나지도 않고? "
말이 이어질수록 공작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음. 성현제가 창백해진 한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음.
" 누구와 있던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럴 일 없어. "
" ...... "
잘 구워진 빵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한유진의 좋지 않은 얼굴에 주방장의 표정도 굳어갔음.
" ...그래요. 그럴 일 없구나. "
그럼, 그 시간들은 다 뭔데.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만 가득한 연회장에 홀로 두고, 테라스로 가버린 건 누군인데.
싸늘한 저택은 또 누가 살던 집이고.
" 저는 여전히 상관없어요. 누구랑 만나 밤을 보내시든. 그건 저랑 관계없는 일이잖아요. "
" ... ... "
" 그냥, 3년 객식구 생겼다 생각해요. "
테이블로 다가온 주방장에게 성현제가 말을 속삭였음. 곧바로 고급스러운 병에 담긴 와인이 테이블 위에 놓였음.
" 달달한 와인이라 아마 입에 맞을 거야. "
" 어떻게 아시는데요. "
" ... 마셔보게. "
마시지 않아도 알 수 있었음. 성현제와 식사할 때 종종 올라오던 술이었으니까.
한유진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 남잔느 언제나 독선적으로 선택지를 종용한다. 물론 칼과 방치 뿐이던 그 때 보다야 지금이 훨 낫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지만.
" 그럼 그만 버텨요. "
" ... 뭐? "
" 어디 마음대로 해봐요. 내 빈껍데기만 갖고 싶다면. "